
최근에 초기 스타트업들의 피칭 이벤트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는데, 참석한 스타트업들의 두 가지 공통점을 발견하였다. 첫 째, 모두 멋진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다는 점. 둘 째, 회사 및 팀에 대해 소개를 하는 슬라이드에 반드시 ‘~ 출신’ 이라는 설명을 빼놓지 않는다는 것.
- 구글 엔지니어 출신 공동 창업자
- 스탠포드 박사 출신 창업팀
- 맥킨지 출신 사업팀
- 엑싯 경험이 있는 창업자
- …
거기에 그럴듯한 투자자와 연관이 있으면 ‘backed by XXX Venture Capital’ 이라는 말도 빼먹지 않는다. 이런 형식의 자신과 팀의 전직 경력, 그리고 회사의 ‘후원자’들을 밝히는 것의 배경은 대략 이럴 것이다:
- 나의 회사에 대해 들어본 사람은 거의 없다 (혹은 아무도 없다).
- 나의 회사가 풀고자 하는 문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이 많지 않다 (혹은 아직 사람들이 풀어야 하는 것인지 모른다).
- 나의 회사가 제시하는 해결책을 (=제품/서비스) 믿는 사람은 더더욱 없다.
- 스타트업의 대부분은 실패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의 회사가 이 ‘대부분’에 들어간다고 생각한다.
- 즉, 위 모든 점들을 통 틀어봤을 때 잠재 투자자 / 고객들은 ‘왜 네가 주장하는 말을 믿어야 되는거지?’라고 질문하는 것이다.
위에서 제기된 의문점들은 잠재 투자자 및 고객으로써 할 수 있는 매우 타당한 질문들 이지만, 동시에 초기 스타트업들이 이런 질문에 대한 똑 부러진 답변을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다 (= known unknowns). 이런 신뢰도 (credibility)의 부재에 대한 대응으로 ‘~출신’을 강조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정보가 부재한 상황에서 평가를 내려야 할 때 대안 지표 (proxy)를 찾으려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모르는 사람들 만났을 때 그가 소위 ‘명문대’를 나왔다고 소개하면 일반적으로 지적 능력이 높을 것으로 생각하고, 주어진 주제와 관련해서도 잘 알 것이라 유추를 한다. 유명 회사 출신, 유명 자문 위원 / 투자자 확보 모두 비슷한 고정관념을 작동시키게 만든다. 즉, ‘저희는 ~출신 창업팀으로 열심히 이 문제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라고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함축하는 것이다:
“여러분이 우리 회사에 대해 들어본 적도 없으시고, 우리의 아이디어가 황당하긴 커녕 ‘사짜 2초 전’으로 들릴 수 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공을 향해 확실히 달려가고 있음을 증명할 수 있는 사업 지표도 아직은 없습니다. 하!지!만! 저희는:
- XX 대학교 박사 출신에 (→ 이미 서로 잘 아는 ‘탄탄한’ 팀 + 우리가 남들보다 주어진 문제들을 잘 풀어 낼 수 있는 높은 지적 능력이 있음.)
- YY 회사 출신 개발팀으로 구성되어 있고 (→ 이런 들어가기 어렵다는 일류 회사에 합격하고 경력을 쌓았는데, 똑똑한 것은 당연하고 해당 분야의 세계 최고 지식 및 노하우를 가지고 있음. 이런 회사 출신으로써 생기는 프리미엄 ‘네트워크’ 역시 우리의 강점.)
- ZZ 벤쳐에서 시드 투자를 받았습니다. (→ 이런 유명한 투자자가 우리에게 베팅 했다는 것은 가능성이 있다는 것 아님?)
이렇기 때문에 저희는 다른 일반 스타트업 보다 더 특별하고, 성공의 가능성이 훨씬 높은 멋진 회사입니다”
이해 및 공감 100% 되고, 또 실제로 상황에 따라 ‘~출신’은 투자자와 고객들에게 신뢰도를 높일 수 있는 유효한 방법이기도 하다. (Boom 이라는 초음속 여객기를 만드는 스타트업은 전(前) 보잉 787 운항 시스템 엔지니어, 전투기 파일럿, 팔콘 로케트 설계 엔지니어 ‘출신’이 주축인데, 그들의 이력을 통해 credibility & legitimacy 가 동시에 성립되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음.) 하지만 대부분의 스타트업의 경우 그들이 성장하면서 보편적이고 구체적인 사업 지표 및 성과를 통해 회사를 정의/소개/피칭하고, 더 이상 회사를 ‘~출신’의 스펙으로 강조하지 않아도 되는 시점을 후속 투자 유치 못지 않은 스타트업의 큰 마일스톤으로 삼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우버는 더 이상 투자를 받을 때 TK가 우버를 시작하기 전 성공적인 엑싯을 한 창업자라고 말 할 필요가 없다. 에어비앤비를 사람들에게 소개할 때 ‘로드아일랜드 디자인 학교 출신의, UX를 기가 막히게 이해하고 구현할 줄 아는 창업자가 만든 회사’라고 수식하지 않는다. 회사와 창업자 뿐만이 아니다. 페이스북의 COO인 쉐릴 샌드버그를 ‘맥킨지 및 월드뱅크 출신 인재’라고 소개할 필요가 없다 (아마 그렇게 한다면 쉐릴 샌드버그가 누구? 라고 할 가능성이 더 높을지도…).
최근 스타트업 세계로 들어간 내 주변의 인생 선배들도 어서 빨리 이런 마일스톤을 찍을 수 있길 바란다. 아니, 그것을 넘어 그들이 새로운 ‘~출신’을 만들어 내는 멋진 회사로 거듭나는 날을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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