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y it forward

http://margaretbourlon.com/gef-requirments/fun_new_culture_stuff/pay-it-forward/

내가 정말 좋아하는 실리콘밸리의 문화가 있는데, 바로 ‘pay it forward’라고 하는 일종의 ‘선행 파도타기’ 정신이다. 흔히 재능 / 조언 / 멘토링 등을 나눌 때 사용하는데, pay it forward란 흔쾌히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손길을 내밀고, 도움을 받은 사람은 도움의 댓가를 되갚는 것이 아니라 (= pay it back) 나중에 도움이 필요한 다른 사람에게 이어서 선행을 베푸는 그런 행동을 일컽는다. 남에게 도움을 주면서 그에 대한 적절한 댓가를 전혀 바라지 않는 이 pay it forward 문화가 합리적이고 계산이 철저한 실리콘밸리에 만연한 것이 신기하기만 한데, a16z의 공동 창업자인 Ben Horowitz가 pay it forward 문화가 실리콘밸리에 왜 존재하고, 또 그것이 어떻게 혁신에 필수적인 요소인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을 했다:

“실리콘밸리의 원동력은 새로운 아이디어에 있고, 새로운 아이디어는 대부분 새로운 사람들이 새롭게 문제에 대해 접근하면서 나오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런 새로운 사람들은 ‘새로운 사람’이기 때문에 가진 것(자본, 인력, 네트워크 등)이 없습니다. Pay it forward는 이런 꿈이 있는 새로운 창업자들이 아무런 비용 없이 도움을 받고 일어설 수 있게 해주는 시스템을 가능하게 합니다. 이 문화가 있음으로 실리콘밸리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발명의 보고가 된 것이라 생각합니다.”

Pay it forward의 대표적인 예로, 스티브 잡스가 아무것도 모를 이십 대 초반 빌 휴렛 (휴렛 패커드(hp)의 그 휴렛)과 밥 노이스 (페어차일드 공동 창업자 + 인텔 창업자)에게 도움을 청했는데 그 때 당시 실리콘밸리의 거인이었던 이 둘은 무명인 괴짜 스티브 잡스를 흔쾌히 멘토링 해줬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마크 주커버그도 페이스북 초창기에 빌 게이츠에게 조언을 구하였는데, 빌 게이츠 역시 관대하게 (generously) 주커버그를 도와줬다는 인터뷰를 본 적이 있다. 이런 ‘썰’ 같은 이야기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나도 몇 년 전 NPS에 대해 더 깊게 연구하고 다른 회사는 NPS를 어떻게 적용하여 제품을 향상시키는지가 알고 싶었는데, 당시 NPS를 종교적으로 숭배했던(?) 슬랙의 CMO Bill Macaitis가 나의 의뢰를 흔쾌히 받아주어 슬랙 본사에 방문, 이 주제에 대해 한 시간 넘게 깊은 대담을 나누는 의미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문화가 실리콘밸리에 있다고 해서 모두가 ‘도와주세요~’, ‘만나주세요~’ 해서 쉽게 댓가 없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나도 예전 한 때 순진한 마음으로 도움을 받고 싶은 사람들에게 무심코 연락을 하고 당당히 연락을 기다린 적이 있었는데 ‘no’는 커녕 dog무시 당하는 부끄러운 실수를 많이 범했다. 모든 문화에는 내재된 관습과 불문율이 있듯이, pay it forward 문화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예절을 지켜야 함을 여러 경험(=실수)과 조언을 통해 깨닳게 되었다.

1. 소개 (warm introduction)로 연결을 시작

실리콘밸리에서 누구에게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만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평판을 매우 중요시 한다. 자뻑이라기 보다는 자신들의 가치와 맞지 않은 것에 연관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다. 예를 들어 모르는 사람을 도와줬는데 만약 그가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나중에 밝혀진다면 ‘guilty by association (연좌죄)’로 매장당할 수 있다. 이에 많은 사람들은 어색한 ‘cold call’에 응답하기 보다 지인에게 ‘믿을 만한 사람’을 소개 받는 ‘warm introduction’을 선호한다. 도움을 받고자 하는 입장에서는 지인 소개로 한 단계씩 접근하는 것이 느리고 비효율적이라 생각될 수 있지만 양 보다 질의 측면에서 보면 너무나 괜찮은 방법이다.

2. 진정성 (genuine) 있게, 그리고 구체적으로 도움을 요청

Pay if forward 정신으로 나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은 그 시간에 대한 기회비용이 나 보다 더 큰 사람들이다. 이에 진정성 있고 구체적으로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좋다. 무엇이 고민이고, 여태까지 어떠한 시도와 노력을 하였고, 왜 이것이 나에게 중요하며, 어떠한 면에서 도움을 받거나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지 구체적으로 명시하면 요청을 받는 쪽에서도 더 효과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고, 의미있는 시간을 보냈다라고 여길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몰랐던 나는 한 때 ‘can I pick your brain over a cup of coffee? (커피 한 잔 나누면서 이것 저것 물어봐도 될까요?)’ 라고 했었는데 뒤늦게 알고 보니 VC 및 실리콘밸리 리더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문구라고… ㅠㅠ

3. 감사 챙기기 (remember to give thanks!)

가장 실행하기 쉬운 동시에 가장 까먹기 쉬운 것 중 하나가 도움을 받은 후 간단하게 ‘감사해요!’ 한 마디 쓰는 것이다. Pay it forward 문화는 지식의 무상 거래 자체가 목적이 아닌, 지식의 거래를 계기로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꼭 도움을 받은 것에 대해 감사하는 것을 잊지 말고, ‘thank you’ 한 마디를 통해 관계를 더 깊게 발전시킬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해 두어야 한다.

Pay it forward … 개인적으로 현재 실리콘밸리의 한국인, 그리고 실리콘밸리와 한국에 걸쳐있는 한국 스타트업들이 노력하여 더 확고하게 정착시켜야 할 좋은 문화라고 생각한다. Pay it forward 문화의 내재화를 통해 서로를 존중하며 도와주는 문화가 더 널리 퍼지기를 바라며, 이로 인해 멋진 세상을 만들어 나가는 위대한 창업자, 제품, 회사들이 더 많이 탄생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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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http://margaretbourlon.com/gef-requirments/fun_new_culture_stuff/pay-it-forward/

프로덕트 매니저 개론

작년 이 맘 때 쯤 ‘프로덕트 마케터 개론’이라는 글을 통해 프로덕트 마케팅 직군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는데, 어느새 그 화려한 마케터의 삶을 접고 제품 담당자로 커리어를 전환한지 거의 일 년이 되어간다. 사업을 전반적으로 총괄하는 업무를 수 년 동안 해 오면서 제품에 관여를 많이 해 왔지만 회사 연구개발 부서에서 엔지니어들과 머리를 맞대고 제품을 hands-on으로 담당해서 만드는 일은 지난 일 년이 처음. ‘직접 경험해 보지 않으면 아는 척 하지 마라’는 말에 너무나 공감이 가는 것이, ‘위에서’ 업무를 조율하고 지시하는 것과 실제로 내가 ‘현장’에서 무엇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경험하였다. 이런 경험을 통해 제품 담당자가 무엇을 하는 사람이고, 또 훌륭한 제품 담당자에서 돋보이는 성향들을 관찰하고, 습득하고, 정리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주의: 이것은 나의 제한된 경험을 바탕으로 정의 된 것이고, 실제로 회사마다 제품 담당자의 정의 및 역할이 다르기 때문에 아래의 내용을 ‘canonical definition’으로 받아드리면 곤란 하다는 것을 미리 공지함.

제품 담당자란? (Who is a product manager?)

“Product Manager is the ultimate person responsible for the success of the product — he/she makes the ‘magic’ happen.”

간단히 말해 제품 담당자는 해당 제품의 전반적인 성공을 책임지는 사람이다. 어느 ‘무엇 (what)’으로 ‘누구 (who)’에게 가치를 제공하는 일을 하고, 그 결과에 따라 성과를 평가받는 직군이다. 제품의 성공 여부를 최종적으로 책임지는 역할이기에 ‘CEO of the product’이라고도 하지만 CEO와 다르게 제품 담당자들을 제품에 관여하는 사람들에 대해 인사권이 전혀 없는 ‘이빨 없는 호랑이’이다. 엔지니어들은 제품 담당자가 원하는 기능을 복잡하고 기술적으로 멋지지 않다고 무시하면 그만, 프로덕트 마케터들이 제품 담당자가 정의한 고객 페르소나 밖의 타겟층에게 마케팅을 해도 제품 담당자가 딱히 할 수 있는 것을 별로 없다. (특히, 그 마케팅을 통해 매출이 확 늘어난다면 더더욱!)

오히려, 제품 담당자는 미식 축구의 ‘쿼터백’과 더 유사하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미식 축구에서 쿼터백은 공을 남에게 건내 주거나 패스를 통해 팀이 전진하도록 하는 업무를 가진, 팀에서 가장 주목받고 중요한 포지션이다. 쿼터백은 스냅이 이루어지면 재빨리 어디가 막혔고 어느 선수가 공을 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는지를 파악하여 의사결정을 해야만 한다. 제품 담당자도 제품의 개발 및 출시에 있어 여러가지 난관을 재빨리 파악하여 팀이 성과를 낼 수 있도록 신속한 의사 결정을 해야한다. 게다가 감독처럼 ‘지시’를 내리는 것이 아니고 동료 엔지니어와 함께 데이터를 보면서 직접 (hands-on) 이런 결정을 내려야 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쿼터백은 경기를 이기면 팀을 대표해서 주목을 받고 지면 팀을 대표해서 욕을 먹는데, 이 역시 제품 담당자의 역할과 일맥상통한다. 비록 제품 담당자가 코딩 한 줄 하지 않았지만 그것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다. (심지어 칭찬을 받으면 팀에게 공을 돌리고, 욕을 먹으면 혼자 짊어지는 미덕도 역시 비슷.)

제품 담당자의 주 업무는?

위 제품 담당자의 정의의 마지막에 “he/she makes the ‘magic’ happen”이라는 문구가 있다. 일부로 멋지게 쓰려고 한 것이 아니라, 저 단어 외로는 광범위하고 때마다 너무 다른 제품 담당자의 주 업무를 표현하기 어려워서 쓴 것이다. 물론, 제품 담당자의 기본 업무는 엔지니어와 같이 협업하여 멋진 제품을 정의하고 개발하여 시장에 출시하는 것이다 (define, build, and release the product to market). 하지만 그것은 성공적인 제품의 필요조건이지 절대로 충분조건이 될 수 없다. (아니, 그 보다 더 본질적으로 ‘제품’이라는 것이 세상에 존재하기 위해 필요한 너무나 당연한 기본 업무 밖에 되지 않는다). 이런 기본적인 업무 외에 제품의 성공에 기여하기 위해 수행해야 하는 제품 담당자들의 주 업무는 다음과 같다고 생각한다:

고객의 숨은 니즈 파악

헨리 포드의 유명한 일화가 있다: “내가 고객들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물어봤다면 그들은 ‘더 빠른 말’을 원한다고 대답을 했을 것이다”. 고객들에게 직접 그들의 니즈를 물어 어떠한 제품을 만들어야 할 지 파악하는 것은 혁신적인 제품일수록 어렵다. 그것을 경험하기 전 까지는 그러한 제품이 필요한지 알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자동차라는 제품을 눈으로 보기 전에는 더 빠른 말이 고객들이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제품이었다. 아이폰을 보기 전에는 컴퓨터의 키보드를 전화기에 옮겨 놓는 것이 대중이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제품이었다. 하지만 고객들의 진정한 니즈는 A 지점에서 B 지점까지 더 편리하고 빨리 갈 수 있는 수단이었고, 컴퓨터 앞에 앉아서만 할 수 있는 일들을 이동 중에서도 계속해서 경험하는 것이었다. 마케팅 부서에서 제공하는 인사이트는 이러한 고객의 니즈에 대한 힌트를 줄 수 있어도 정말 고객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또 어떠한 경험과 제품이 그런 궁극적인 니즈의 ‘심금’을 울릴 수 있는지 깊게 생각하고 파악하는 것은 제품 담당자의 몫이다. 말로는 쉽지만 실제로는 너무나 어려운 업무이다.

살을 깎는 트레이드오프 (trade-off)

100이면 100, 내가 아는 모든 제품 담당자들은 할 것은 너무 많고, 주어진 로드맵을 온전히 실행하기 위해 필요한 엔지니어 팀원들은 너무 적다고 불평을 한다. 단 한 명도 팀에 엔지니어가 넉넉하여 여유롭다고 하는 경우를 보지 못하였다. 항상 제품 담당자들이 꿈꾸는 ‘이상적인’ 제품과 그 제품을 만들 때 현실적으로 닥치는 기술적인 난관, 버그, 제품 방향의 긴급 수정 등의 일들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럴 때 제품 담당자의 핵심 업무는 제품의 성능, 기능, 출시 기한을 어떻게 타협할 것인가에 대한 어려운 결정을 해야만 한다. 꼭 필요한 기능 (must-have) 중에서 또 다시 추리고, 엔지니어들과 묘수를 찾기 위해 고민을 하고, 고객들이 이탈한다고 ‘협박’하는 영업팀과 마케팅팀들의 원성을 원활하게 조율하되, 제품의 궁극적인 비전에서 벗어나지 않는 트레이드오프 결정 과정은 과학이 아닌 예술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팔방미인 코스프레 (jack of all trades)

이 외에 제품 개발 및 출시에 있어 막히거나 더딘 부분이 있으면 제품 담당자가 책임지고 해결해야 한다. 아무리 그것이 자잘하거나 제품 담당자의 ‘job description’ 밖에 있는 것일지라도 제품의 성공을 막는 그 어느 요인이 있다면 그것은 자동적으로 제품 담당자의 업무가 되는 것이다. 고객 인터뷰를 하거나, 고객의 항의성 C/S 전화를 받고, 영업팀에서 급하게 필요한 자료를 만들어 주고, 현장에서 일어난 일을 수습하기 위해 당장 뛰어 나가는… ‘제품 담당자 직군 매뉴얼’에 쓰여있진 않지만 제품 담당자들이 때와 상황에 맞추어 해야하는 업무이다. 이런 것들을 다 해결할 때 비로소 ‘magic’이 일어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는 것이다.

훌륭한 제품 담당자가 되기 위하여…

동료 제품 담당자들과 ‘우리 업’에 대해서 종종 이야기를 하는데,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훌륭한 제품 담당자가 되기 위해선 계량화 하기 어려운 ‘소프트’한 것들이 매우 중요한 것 같다는 결론을 자주 내리게 된다. 실제로 내가 존경하고 훌륭하다고 생각되는 제품 담당자들을 관찰하고, ‘전설적인’ 제품 담당자들의 글을 읽고 제품을 경험하며, 또 그들에게서 종종 조언을 들으면 다음과 같은 ‘soft skill’들의 훈련과 발전이 훌륭한 제품 담당자의 길로 가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된다:

기술적인 호기심 가득 (Technically Curious)

최근에 제품 담당자가 되고 싶어하는 친구들에게 가장 많이 들은 질문이 “코딩 할 줄 알아야 되나요?”, “기술적인 지식이 깊어야 하나요?”이다. 특히 컨설팅 및 MBA 출신 친구들이 다른 ‘스펙’은 다 되는데 기술적인 부분이 약하다고 제품 담당자에 지원하는 것을 고민하는 것을 많이 본다. 몇 달 전 Hunter Walk와 이 부분에 있어서 Q&A를 할 수 있는 시간이 있어 물어봤는데 그의 대답이 이 질문에 매우 적절한 것 같다.

“You don’t have to be technical per se, but you need to be technically curious. (기술적일 필요는 꼭 없지만, 기술적인 것에 대한 호기심이 있어야해요)”

테크 회사에서 제품 담당자는 기술을 이용하여 고객에게 가치를 줄 수 있는 제품을 만들고, 그 제품의 성공을 책임지는 사람이다. 이에 기술을 어떻게 이용해서 어떤 멋진 경험을 선사할 수 있을지 항상 고민해야 한다. 이런 호기심 없이는 세상을 바꾸는 훌륭한 제품을 상상해 내고, 또 그것을 현실적인 제약에 맞추어 성공적으로 구현해 내는 훌륭한 제품 담당자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왜? What & WHY

무엇을 만들 것인가, 즉 제품에 대한 정의를 하는 것은 제품 담당자의 기본 역량이자 업무이다. 하지만 뛰어난 제품 담당자들은 제품 정의에 대한 명확한 논리와 강력한 설득력이 있다. 왜 주어진 상황이 문제인지, 그리고 그 문제를 풀기 위해서 왜 이러한 제품을 만들어야 하는지에 대해 정확한 논리와 뜨거운 열정이 느껴지는 제품 담당자들과 일하는 팀은 대체적으로 능률이 더 높으며 제품의 성과도 훨씬 좋은 편이다. 문제에 대한 인식과 제품에 대한 정의가 명확하기에, 애매하고 대충 정의된 제품을 만들 때 늘 따라오는 trial & error 및 기타 ‘삽질’과 짜증남을 피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추상화 (Abstraction)

제품을 개발할 때 고객들이 가지는 문제, 그리고 그것을 풀 수 있는 방법을 잘 추상할 수 있으면 문제의 어느 특정한 부분에 발목 잡히지 않고 문제의 전반적인 본질을 이해할 수 있으며, 또 이에 필요한 해법의 방향과 전략을 가늠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위에서 언급한 ‘더 빠른 말을 원하는 고객’들의 진정한 니즈는 이러한 추상화 과정을 통해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추상화를 못했다면 아마 더 단단한 말굽, 더 공기역학적인 안장, 말의 근육량을 늘릴 수 있는 사료들에 집중했을 것이다.) 단, 여기서 중요한 것은 추상화의 과정은 자세한 것에서 부터 시작한다는 점. 자세한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냥 큰 그림만 겉핥기 식으로 파악하는 것은 위험하다. 또한 너무 과하게 추상을 하여 현실과 너무 동 떨어지는 상상을 하는 것은 큰 꿈을 꾸는 제품 담당자가 아닌 허황된 생각만 하는 바보라는 것을 경계해야한다. (‘빠른 말’에서 얻은 ‘아 고객들은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빨리 이동하고 싶어하는구나’ 라는 인사이트를 ‘순간 이동 텔레포터’ 제품으로 풀려는 꼴)

유연함 (Flexibility)

팔방미인 코스프레를 하기 위해선 유연한 성격 및 뛰어난 ‘현장 적응 능력’이 있어야만 한다. 유연하지 못하고 ‘대쪽’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다면 답답한 상황에 스트레스만 쌓이고 자신이 정한 제품 담당자의 역할에 대한 제한적인 ‘행동 반경’ 때문에 제품의 성공에 크게 기여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물론, 제품의 비전과 제품의 핵심적인 가치에 대해선 확고함이 필요하겠지만 비전과 전략만큼 중시되는 제품 담당자의 실행 능력에 있어서 만큼은 유연함이 필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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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품 담당자라는 직군… 실리콘밸리에서는 흔하다고 하지만 기존 직군들과 비교해서는 상대적으로 새롭고, 이에 직군에 대한 정의와 역할이 아직 명확하지 않은 상태이다. 앞으로 더 많은 훌륭한 제품 담당자들의 활약을 통해 이 직군이 조금 더 명확해지고 회사에서 ‘없어서는 안될’ 너무나 당연하고 필요한 직업으로 거듭나길 바라며, 나 역시 이 개인적인 바램에 일조할 수 있도록 더욱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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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이 정의는 내 친구이자 훌륭한 제품 담당자로 십 수 년 동안 실리콘밸리에서 활약하고 있는 Sachin Rekhi에게서 차용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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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트업의 ‘~출신’ 마일스톤

최근에 초기 스타트업들의 피칭 이벤트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는데, 참석한 스타트업들의 두 가지 공통점을 발견하였다. 첫 째, 모두 멋진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다는 점. 둘 째, 회사 및 팀에 대해 소개를 하는 슬라이드에 반드시 ‘~ 출신’ 이라는 설명을 빼놓지 않는다는 것.

  • 구글 엔지니어 출신 공동 창업자
  • 스탠포드 박사 출신 창업팀
  • 맥킨지 출신 사업팀
  • 엑싯 경험이 있는 창업자

거기에 그럴듯한 투자자와 연관이 있으면 ‘backed by XXX Venture Capital’ 이라는 말도 빼먹지 않는다. 이런 형식의 자신과 팀의 전직 경력, 그리고 회사의 ‘후원자’들을 밝히는 것의 배경은 대략 이럴 것이다:

  • 나의 회사에 대해 들어본 사람은 거의 없다 (혹은 아무도 없다).
  • 나의 회사가 풀고자 하는 문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이 많지 않다 (혹은 아직 사람들이 풀어야 하는 것인지 모른다).
  • 나의 회사가 제시하는 해결책을 (=제품/서비스) 믿는 사람은 더더욱 없다.
  • 스타트업의 대부분은 실패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의 회사가 이 ‘대부분’에 들어간다고 생각한다.
  • 즉, 위 모든 점들을 통 틀어봤을 때 잠재 투자자 / 고객들은 ‘왜 네가 주장하는 말을 믿어야 되는거지?’라고 질문하는 것이다.

위에서 제기된 의문점들은 잠재 투자자 및 고객으로써 할 수 있는 매우 타당한 질문들 이지만, 동시에 초기 스타트업들이 이런 질문에 대한 똑 부러진 답변을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다 (= known unknowns). 이런 신뢰도 (credibility)의 부재에 대한 대응으로 ‘~출신’을 강조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정보가 부재한 상황에서 평가를 내려야 할 때 대안 지표 (proxy)를 찾으려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모르는 사람들 만났을 때 그가 소위 ‘명문대’를 나왔다고 소개하면 일반적으로 지적 능력이 높을 것으로 생각하고, 주어진 주제와 관련해서도 잘 알 것이라 유추를 한다. 유명 회사 출신, 유명 자문 위원 / 투자자 확보 모두 비슷한 고정관념을 작동시키게 만든다. 즉, ‘저희는 ~출신 창업팀으로 열심히 이 문제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라고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함축하는 것이다:

“여러분이 우리 회사에 대해 들어본 적도 없으시고, 우리의 아이디어가 황당하긴 커녕 ‘사짜 2초 전’으로 들릴 수 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공을 향해 확실히 달려가고 있음을 증명할 수 있는 사업 지표도 아직은 없습니다. 하!지!만! 저희는:

  • XX 대학교 박사 출신에 (→ 이미 서로 잘 아는 ‘탄탄한’ 팀 + 우리가 남들보다 주어진 문제들을 잘 풀어 낼 수 있는 높은 지적 능력이 있음.)
  • YY 회사 출신 개발팀으로 구성되어 있고 (→ 이런 들어가기 어렵다는 일류 회사에 합격하고 경력을 쌓았는데, 똑똑한 것은 당연하고 해당 분야의 세계 최고 지식 및 노하우를 가지고 있음. 이런 회사 출신으로써 생기는 프리미엄 ‘네트워크’ 역시 우리의 강점.)
  • ZZ 벤쳐에서 시드 투자를 받았습니다. (→ 이런 유명한 투자자가 우리에게 베팅 했다는 것은 가능성이 있다는 것 아님?)

이렇기 때문에 저희는 다른 일반 스타트업 보다 더 특별하고, 성공의 가능성이 훨씬 높은 멋진 회사입니다”

이해 및 공감 100% 되고, 또 실제로 상황에 따라 ‘~출신’은 투자자와 고객들에게 신뢰도를 높일 수 있는 유효한 방법이기도 하다. (Boom 이라는 초음속 여객기를 만드는 스타트업은 전(前) 보잉 787 운항 시스템 엔지니어, 전투기 파일럿, 팔콘 로케트 설계 엔지니어 ‘출신’이 주축인데, 그들의 이력을 통해 credibility & legitimacy 가 동시에 성립되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음.) 하지만 대부분의 스타트업의 경우 그들이 성장하면서 보편적이고 구체적인 사업 지표 및 성과를 통해 회사를 정의/소개/피칭하고, 더 이상 회사를 ‘~출신’의 스펙으로 강조하지 않아도 되는 시점을 후속 투자 유치 못지 않은 스타트업의 큰 마일스톤으로 삼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우버는 더 이상 투자를 받을 때 TK가 우버를 시작하기 전 성공적인 엑싯을 한 창업자라고 말 할 필요가 없다. 에어비앤비를 사람들에게 소개할 때 ‘로드아일랜드 디자인 학교 출신의, UX를 기가 막히게 이해하고 구현할 줄 아는 창업자가 만든 회사’라고 수식하지 않는다. 회사와 창업자 뿐만이 아니다. 페이스북의 COO인 쉐릴 샌드버그를 ‘맥킨지 및 월드뱅크 출신 인재’라고 소개할 필요가 없다 (아마 그렇게 한다면 쉐릴 샌드버그가 누구? 라고 할 가능성이 더 높을지도…).

최근 스타트업 세계로 들어간 내 주변의 인생 선배들도 어서 빨리 이런 마일스톤을 찍을 수 있길 바란다. 아니, 그것을 넘어 그들이 새로운 ‘~출신’을 만들어 내는 멋진 회사로 거듭나는 날을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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